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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하 이병도의 역사 연구방법과 현실인식

    관리자 2017-10-13 21:24 1948

           일제하 이병도의 역사 연구방법과 현실인식

     

     

                                                                                                                     최경선(연세대 박사수료)

     

     

    1. 머리말

      해방 이후 국가건설 과정에서의 좌우대립과 남북분단의 과정을 거치면서 식민지 시기 일제 관학으로부터 역사학을 배운 ‘실증사학자’들이 역사학계의 주류를 차지하였다. 이들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상이한 평가가 계속되어 오고 있다.

      ‘실증사학’이 개별적인 사실의 고증에만 치우쳐 역사 전체를 관통하는 체계를 갖지 못하였다는 역사학으로서의 한계를 지적하지만, 근대역사학의 수립에 큰 기여를 하였음을 인정해야 한다고 본다. 한편, 사관이 부재한 채 사실 그 자체를 밝히는 것을 목표로 삼는 일본의 관학 아카데미즘과 동일한 연구방법을 취하였다는 점을 문제 삼으며, 그러한 연구방법으로 인해 식민지 현실에 정치적, 적극적 입장을 취하지 않은 것으로 이해되었다.

      공통적으로 사관의 부재를 지적하고 있는데, 실증사학을 옹호하는 측에서는 실증사학자들이 ‘순수학문’을 표방하면서 한편으로 식민사학에 저항하는 측면이 있었음을 제시하기도 한다. 하지만 실증사학자들이 가지고 있던 식민지 현실에 대한 인식이 곧 역사인식 그리고 역사서술과 연결될 것이므로 실증이라는 연구방법만을 검토하지 않고, 그들의 현실인식까지도 가급적 검토해 보려고 하였다.

      종래 실증사학자로 분류되었던 이들의 현실인식과 역사서술을 연결 지어 보려는 시도로서 일제 시기 대표적인 역사학자였던 이병도의 사관을 밝혀 보고자 하였다. 이병도는 ‘조선문화’의 고유성, 우수성을 말하였는데, 그가 말한 ‘조선’의 함의에 주의해 보면서, 그가 취하였던 문화주의적 입장을 역사서술과 연결 지어 보고자 한다.

     

    2. 이병도의 생애와 활동

      斗溪 李丙燾(1896~1989)는 1896년 8월 경기도 용인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牛峰 이씨이며, 아버지는 충청도 수군절도사직에 있었다. 어렸을 때 한학교육을 받았으며, 1907년 12세에 서울로 이사와 普光學校, 中東學校 일어속성과, 일본인이 경영하는 佛敎高等學校 예과과정을 거쳐 보성전문학교 법률학과에 입학하였다. 하지만 법학 공부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오히려 국제공법을 공부할 때 나왔던 역사적 사례들에 흥미를 느꼈고, 또 어렸을 때 배운 『통감』이나 『사기』에서 느낀 감흥을 되새기며 역사 공부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역사를 공부하기 위해 일본으로 유학하여 와세다대학 예과를 거쳐 와세다대 문학부의 ‘史學及社會學科’에 입학하였다. 처음에는 게무리야마 센타로(煙山專太郞) 교수 밑에서 서양사를 전공하고자 하였으나, 당시 일본사의 권위자였던 요시다 도고(吉田東伍) 교수의 󰡔日韓古史斷󰡕이라는 책을 읽고, 또 그의 강의를 듣고서 ‘조선사’를 공부하기로 마음을 바꾸었다고 한다. 그는 요시다 도고 교수의 후임으로 온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 강사와 그를 통해 알게 된 도쿄제대의 이케우치 히로시(池內宏)로부터 학문적인 영향을 받았다. 그는 「高句麗 對隋唐戰爭에 대한 硏究」라는 제목의 졸업논문으로 제출하고 1919년 7월에 졸업하였다.

      귀국 후 5년가량은 경성 중앙고등보통학교에서 역사․지리 및 영어 교사로 일하였다. 본인은 이 시기 동안 국사연구를 제대로 하지 못하였다고 회고하였지만, 강사로 일하는 와중에도 󰡔東亞日報󰡕에 1923년 9월 28일부터 1924년 2월 24일까지 88회에 걸쳐 「朝鮮史槪講」을 연재하였으며, 염상섭을 비롯한 여러 문인들과 『廢墟』라는 잡지를 창간하거나 문인회를 발기하는 등의 문화운동을 벌였다.

      1925년 30세의 나이에 이케우치의 권유와 추천으로 조선사편수회의 修史官補에 임명되었다. 이 시기에 식민지 문화지배를 위한 방편으로 기존의 편찬위원회가 1925년 조선사편수회로 개편되면서 더욱 조직적인 편찬 작업이 진행되게 되었다. 조선사편수회가 총독 직할의 독립관청으로 승격하여, 수사관, 수사관보, 서기 등의 직원을 두는 등 『朝鮮史』 편찬에 필요한 전문직 실무진이 보강되었고, 이병도는 이러한 과정에서 조선사편수회에서 일하게 된 것이다.

      그는 이마니시 류(今西龍)의 수사관보로서 1932년에 발행된 󰡔朝鮮史󰡕 제1편 「신라통일 이전」, 제2편 「신라통일시대」, 제3편 「고려시대」의 편찬을 담당하였다. 그는 1927년까지 일하고 수사관보를 그만두고, 촉탁을 맡아 1938년 6월경까지는 활동한 것으로 확인된다. 단, 촉탁에서 물러난 시기는 확인되지 않는다.

      그의 학술활동이 시작된 시기는 조선사편수회에서 일하고 난 이후부터였다. 그는 1926년 처음으로 朝鮮史學同好會의 『朝鮮史學』에 「李栗谷의 入山動機에 對하여」와 「陰陽地理와 그 傳來에 對하여」를 잇따라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학문활동을 시작하였다. 1934년 震檀學會의 󰡔震檀學報󰡕가 창간되기 전까지 東京大學文學部內史學會의 『史學雜誌』와 『東洋學報』, 조선사편수회 기관지인 『靑丘學叢』, 『朝鮮學報』 등 일본학술지에 꾸준히 논문을 발표하였다. 그가 일본학계에 발표한 논문 중 조선시대 유학사, 고려와 조선초기의 풍수도참사상에 관한 논문이 대다수를 차지하며, 진번군, 현도군과 임둔군 등 漢四郡의 위치를 비정한 논문도 이 무렵 발표되었다.

      1930년대에는 대학에서 정식으로 근대학문을 배운 전문연구자들이 늘어났다. 이병도의 후배로 와세다대에서 역시 사학을 전공하고 귀국한 金庠基, 李相佰, 孫晋泰 등이 있었으며, 1924년 경성제대가 창립되어 1930년대에 柳洪烈, 申奭鎬 등 사학자와 李崇寧, 趙潤濟 등 국어국문학자들이 배출되어 학회를 조직할 만한 인력이 갖추어졌다. 한편으로 신간회의 해소(1931), 만주사변 등 당시의 전반적인 정세 변화 속에서 민족주의 우파는 학술, 문화, 예술, 언론 등의 발전을 통하여 문화적 영역의 발전을 도모하는 운동론을 펼치던 시기였다.

      그러한 배경 속에서 조선인에 의해 조선(문화)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져 조선문화를 개척․발전․향상시킬 것을 목표로 하여 1934년 이병도의 주도적 역할에 의해 震檀學會가 창립되었다. 이병도를 중심으로 趙潤濟, 李允宰, 孫晉泰 등이 합석하여 준비모임을 가진 다음 정식으로 학회 발족을 보게 되었다. 이때 학회의 발기인으로는 高裕燮, 金斗憲, 金庠基, 金允經, 金台俊, 金孝經, 李秉岐, 이병도, 李相佰, 李瑄根, 이윤재, 李殷相, 李在郁, 李熙昇, 文一平, 朴文圭, 白樂濬, 손진태, 宋錫夏, 申奭鎬, 禹浩翊, 조윤제, 崔鉉培, 洪淳赫 등 24명이 나섰다. 사학, 국어국문학, 미술사, 윤리학, 민속학 등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들이 참여하였으며, 찬조회원으로 김성수, 송진우, 윤치호, 이광수, 조만식, 최두선과 같은 당시 저명인사와 권상로, 이능화, 현상윤, 황의돈, 안확, 이중화, 이극로와 같은 학계 원로, 선배들이 학회를 후원하였다.

      학회가 창립되는 과정에서 이병도가 학회의 이름을 제안하였는데, 이때 ‘震檀’의 의미는 ‘朝鮮’의 異稱이나, 학회가 목표로 하는 연구범위가 조선을 중심으로 하는 주변 여러 나라를 포괄하기 때문에 ‘진단’의 의미도 넓은 의미에서 ‘동양’을 뜻한다고 밝히었다. 이병도의 집에 학회 사무실을 두고 이병도가 편집과 발행을 맡아 학회를 주도적으로 이끌어갔다. 또한 1939년까지 열성적으로 「三韓問題의 新考察」을 비롯하여 십여 편의 논문을 『震檀學報』에 발표, 게재하였다. 진단학회는 일제 당국의 별다른 박해 없이 1942년까지 존속, 활동하였으나,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이윤재, 이희승 등 국어학 전공 회원들이 투옥되어 자체적으로 해산하였다.

      이병도는 해방 전까지 『진단학보』에 번역, 게재하였던 『하멜표류기』(1939, 博文書館)와 『三國史記』 역주본(1941, 博文書館) 등을 책으로 냈고, 고려시대 도참사상에 대한 연구결과를 도쿄대학 박사논문으로 제출할 계획이었으나, 태평양전쟁과 이케우치의 사망으로 포기하였다. 1937년 중일전쟁 이래 일제가 ‘內鮮一體’, ‘滿鮮一如’를 강조하는 상황 속에서 1941년 『朝光』 11월호에는 ‘內鮮文化의交流’라는 특집기사가 실렸고, 여기에는 이병도의 「三國時代文化의 東流」라는 글이 포함되었다. 또한 1943년에는 󰡔每日新報󰡕에 「<出陣學徒에게 보내는 말>어머니의 굳센 격려, 전투용기를 백 배나 더하게 한다」는 글을 기고하며 일제가 조선인을 전쟁에 동원하는 데 일조하는 모습을 보였다.

      해방 이후 그는 친일 논란을 겪으며 진단학회에서 일시 입지가 약해지기도 하였으나, 해방 직후 미군정 하에서 발 빠르게 국사교육와 경성제대의 인수․개편과정에 참여하며 역사학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또한 6.25전쟁을 겪으면서 사회경제사학자와 민족주의사가들이 월북 또는 납북되고, 전쟁 후 반공주의가 팽배한 가운데 친일 논란이 누그러지면서 그 위상을 회복할 수 있었다. 1954년 법인체로 재출발한 진단학회의 이사장에 취임해 학회를 이끌었고, 4.19 혁명 직후 허정 과도정부 하에서 짧은 기간이지만 문교부 장관을 지냈다. 그리고 학술원 원장(1960~1981),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제5공화국 국정자문위원(1980~1985), 민족문화추진회 이사장(1982~1989) 등을 역임하였다.

    이병도는 거의 한 세기에 가까운 삶을 살며, 많은 저술과 논문을 남겼다. 그에 대해 문헌고증에 입각하여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입장에서 학문에 정진한 ‘순수 학자’로 이해하기도 하지만, 해방 이후의 행보에 대해서는 국가주의적인 언설을 통해 국사를, 현실정치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동원하는 모습을 보여 그가 ‘변신’한 것으로 본다. 그러나 그의 삶과 역사학을 일관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실증’이라는 역사 연구방법뿐만 아니라 현실인식, 사관까지 고려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3. 역사 연구방법으로서의 실증

      이병도는 처음으로 일본에 유학하여 근대학문으로서 역사학을 전공한 연구자였다. 그는 1910년대 일본에서 유학하며 일본에 형성된 근대 역사학의 영향을 받았다. 따라서 당시 일본에 형성된 근대 역사학의 특징, 특히 독일의 역사가 랑케(Leopold von Ranke)의 역사주의 수용에 대해서 간략히 살펴보며, 이병도의 역사연구의 특징을 다루어 보고자 한다.

      일본 근대 역사학은 전통적인 고증학의 토양 위에 유럽 모델을 모방한 역사학의 여러 제도와 사료 비판 수법이 이식됨으로써 성립되었다. 독일 베를린대학 사학과를 나온 루드비히 리스(Ludwig Riess)는 1887년 일본에 와서 1902년까지 머무르며, 도쿄제대에서 역사학 방법론, 세계사, 영국 헌정사 등의 강의와 연습을 담당하였다. 그가 베를린대학을 다닐 시기에는 이미 랑케가 은퇴하였기 때문에 그로부터 직접 사사받지는 못하였으나 랑케의 학풍을 계승하였고, 일본에 랑케의 역사학을 전하며, 근대적인 역사연구를 위한 여러 제도(학회, 학술지, 사료 수집기관)를 갖추는 데 기여하였다.

      19세기 ‘역사주의’는 랑케에 의해 완성되었다고 평가된다. 랑케는 칸트와 헤겔의 영향 속에 19세기 독일에서도 왕성했던 진보사상, 관념적 철학을 거부하고, 모든 시대는 神에게 직접 연결되어 있으며, 각 시대의 가치는 그 실존 속, 그 고유한 자체 속에 존재한 것으로 보았다. 역사 진행의 매 순간이 신에 의한 것은 아니지만, 그 속에는 신성이 내재되어 있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그의 사상에서는 역사 속의 모든 순간, 민족, 시대 등의 각각의 개체가 그 자체로서 가치를 지니는 것이며, 이때 개체는 별개의 것이 아니라 전체와의 관계 속에서 보편성을 내재한 것으로 이해되었다. 이렇듯 ‘개체성’에 주목하여 과거를 현재의 기준이 아닌 과거 자체의 기준으로 고찰하여 개체가 ‘실제 어떻게 존재하였는가’를 구체적으로 밝히는 작업이 중요하였고, 역사 속에서 법칙을 추구하는 연구나 법칙론적 역사연구 방법을 반대하였다. 그는 역사가의 과업을 “존재의 근원으로까지 파고들어가 완전한 객관성을 가지고 서술하는 것”이라고 정의하였다. 과거의 역사적 사실은 역사가가 관찰하기 이전에 이미 본질을 간직하고 실재하며, 그것을 객관적으로 재현하는 것이 가능하리라는 믿음을 전제한 것이다. 이러한 랑케의 입장에서 사료의 비판적 조사는 역사학에 철학이나 문학으로부터 독립된 학문분과(과학)로서의 지위를 부여해주는 방법으로 중요하게 여겨졌다.

      랑케의 원칙은 서양에서 역사연구와 교육의 기본으로 받아들여졌으며, 일본의 역사학에도 받아들여졌다. 다만 그의 역사주의의 종교적인 성격은 일본인 연구자들에게 그대로 받아들여진 것 같지 않으며, 문헌 사료의 비판적 검토를 중시하는 측면(실증)은 리스를 통하여 일본사학과 동양사학의 연구방법에 영향을 미쳤다.

      앞서 생애에서도 살펴보았듯이 이병도에게 학문적 영향을 준 일본인 학자로 쓰다 소치키와 이케우치 히로시를 꼽을 수 있다. 이 두 사람은 모두, 리스의 제자로 도쿄제대에서 서양사학을 전공한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와 관계를 맺었다. 도쿄제대 출신인 이케우치의 경우 당연히 문헌비판적이고 합리성을 추구하는 랑케류의 고증사학을 추구하였으며, 와세다대 출신인 쓰다의 경우는 합리주의와 일본 문화의 세계사적 개성을 파악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일제시기에 이병도가 자신의 역사연구에 대해서 언급한 글을 찾기는 어렵다. 해방 이후에 집필한 󰡔朝鮮史大觀󰡕과 1975년의 󰡔韓國古代史硏究󰡕를 통해 그의 역사연구방법에 대한 생각을 살펴보겠다.

     

          그러나 歷史는 단지 事實의 記錄으로써 끝이는 것이 아니다. 史料와 事實을 檢討하고 批判하고 思索하여 社會生活의 各 相異한 時代間에 存在한 因果的인 關聯과 繼起性을 밝히는 同時에 그 裏面 혹은 그 以上에 들어나 있지 않는 어떤 意義와 法則과 價値를 발견하면서 항상 새롭게 觀察하여야 한다. 材料와 事實을 뼈(骨)에 比喩해 말한다면 거기에 對한 批判的인 思索的인 새 見解는 살(肉)과 生命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歷史가 새롭게 考察될수록 歷史는 더욱 살쩌가고 理解가 깊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歷史를 새롭게 考察한다고 客觀을 沒却한 主觀이거나 어느 한 個人의 史觀에 치우치거나 또는 事實을 孤立的標本으로 考察한다면 그것은 잘못이다. 항상 客觀을 土臺로 삼아 視野를 넓히여 多角的으로, 縱的(時間), 橫的(空間), 心的 物的인 關聯下에서 公正하게 觀察하여야 한다. (李丙燾, 1948 「總說」 『朝鮮史大觀』, 同志社, 2~3쪽)

          史學徒로서는 古典에 대한 深刻한 檢討와 冷嚴한 分析批判을 결여하여서는 아니 된다. 고전의 기록이라고 해서 徹頭徹尾 그대로 信從하려 하거나, 또는 주관적으로, 자기나름대로, 이렇다 저렇다 하는 것은 眞理를 탐구하는 學徒의 태도라고는 볼 수 없다. (李丙燾, 1975 「自序」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10쪽)

     

      이병도는 역사가 사실의 기록에 그치지 않고, 이면의 의의와 법칙, 가치를 발견하는 일이라고 하면서, 동시에 객관을 몰각한 주관을 거부하고, 항상 객관을 토대로 삼아서 역사의 연구에 임해야 한다고 하였다. 실상 무게를 두고 있는 쪽은 후자라고 생각된다. 사료에 대한 엄격한 검토와 비판과 함께 주관적인 입장을 배제한 태도가 ‘眞理’를 탐구하는 학도에게 요구되는 것이다.

      사료를 중시하는 측면은 시대와 나라를 뛰어넘어 최대한 많은 사료들을 망라하여 검토하고 이를 제시하는 글쓰기 방식에서도 드러난다. 논증 과정에서 사료 자체에 기대는 비중이 매우 큰 것이다. 또한 이병도가 힘썼던 작업 중 하나가 『삼국사기』, 『삼국유사』의 역주작업이었던 점, 그리고 해방 이후 서지학회를 조직하여 학술지 『書誌』를 간행했던 점에서도 이병도가 사료의 정리를 얼마나 중시하였는지를 살필 수 있다.

      그런데 그가 이렇게 사료의 검토를 통한 객관의 확보에 치중하였던 것은 랑케의 역사주의에서 나타난 듯 그러한 방법 자체가 개체의 본질, 진리를 드러낼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병도의 스승이었던 쓰다 역시도 “역사는 사실을 밝히는 것이다. 사실을 사실 대로 보는 데에서 진실한 사고가 솟아난다.”라고 하였다.

      ‘실증’이라는 역사 연구방법은 근대 역사학으로서 필수적인 요소로 지적되지만, 한편으로 개개의 사실을 밝히는 데 치중하여, 역사 전체를 일관하는 일정한 체계를 갖지 못하였다는 비판을 면치 못하였다. 이병도가 『朝鮮史大觀』에서 “원래 역사란 것은 흐르고 흐르는 부단한 연속상에서 성립하는 것임으로, 截(절)연한 시대구분을 정한다는 것은 사못 부자연한 일이다. 더욱이 정치적 변동기로써 시대를 구분한다는 것은 매우 무리하고 날근 방법이라 하겠다. 그러나 흐르는 물에도 구비가 있고 파동이 있다. 정치의 파동은 역사의 큰 구비요 파동인 것이다.”라고 하면서 나라의 흥망, 분열과 통일, 외부세력과의 투쟁의 과정으로서 시대구분을 한 점도 그러한 면을 반영한 것이라고 여겨진다.

      그리고 이병도를 비롯한 실증사학자들은 식민지 현실에 대해서 한 발짝 물러서 민족주의나 사회주의 간의 논쟁에 전혀 끼지 않은 채 ‘실증’을 통하여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순수학문’을 추구하였다고 한다. 史觀이 부재한 채 객관적 사실만을 추구하는 태도로 인하여 식민지 지배에 대해서 아무런 문제제기를 하지 않은 것은 실증사학의 큰 문제로 지적된다.

      하지만 역사(학)은 현실의 충만한 재현이 아니며, 주어진 자료들을 특정한 의도에 맞추어 그 인과관계를 재구성하고 현실에 대한 특정한 이해를 반영시키는 작업이기도 하다. 이병도의 역사연구가 이를 직접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이병도가 가졌던 당대 현실에 대한 인식이 그의 역사연구에 영향을 미쳤으리라 본다. 그런데 ‘실증사학’이라고 할 경우, ‘실증’은 역사연구의 방법론만을 가리킬 뿐이므로, 이병도의 현실인식을 통해 그가 지녔던 역사관을 드러내고, 그를 통해 이병도의 역사학을 규정지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4. 현실인식으로서의 문화주의적 입장

      앞서도 언급하였지만, 일제시기 동안의 이병도의 역사연구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기술한 글을 찾기는 어렵다. 이병도는 일본에서 유학하던 시절에 在日本東京朝鮮留學生學友會의 잡지인 『學之光』에 두 편의 글을 남겼다. 그 중 하나인 1918년에 쓴 「讀書偶感」은 그리피스(W. E. Griffis)의 『은자의 나라 한국』을 소개한 글로서 역사 연구에 대한 그의 입장과 현실인식을 어느 정도 읽어낼 수 있다고 생각된다. 또 귀국 후 염상섭 등 문인들과 함께 창간한 『廢墟』 1-1(1921)에도 「朝鮮의 古代藝術과 吾人의 文化的使命」이라는 글을 기고하였다. 둘 다 20대 젊은 시절에 쓴 글이기 때문에 일제시기 동안의 그의 인식 전모를 살펴보기에는 한계가 있지만, 어느 정도 초기의 인식이 지속되는 면이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에 이 두 글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병도는 「讀書偶感」에서 미개하고 우열하고 약소하고 유치한 조선사람에게 진심어린 충고와 강렬한 힌트를 주어 일깨워주려 한 그리피스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 과학과 진리, 순전한 종교에 의해서 동포를 開發시켜 옛 구습을 타파하고 자국의 안전과 독립을 지키려는 조선의 志士에게 이 책을 바친다는 그리피스의 헌사는 1918년 당시의 조선 청년들에게도 금과옥조와 같은 말이라고 여겼다.

      이병도는 서구의 문물을 수용하여 근대화를 이루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한 현실에 안타까워하며, 당시 현실을 극복할 방법을 유럽의 문예부흥(르네상스)의 예로서 이야기하였다.

     

         此의適好한例를 擧하기爲하여 西洋史에 徵看하여보면 十五世紀 伊太利를中心으로 하고蹶起한 文藝復興은 처음 世界歷史로하여금 불(火)니러남과 갓치 바람니러남과갓치 매드럿다. 그原因인즉 勿論 古典의硏究와 大學의創立과 사라센文明의接觸이오 또 그 影響인죽 美術의復興 新大陸新航路의 發見 其他諸般科學上의發明 及現代歐洲文明을 産出함에 在하다謂할지라. 換言하면즉 如斯한 諸種의新發見新發明及其新文明이 根源업시 俄然히 中間에서 湧出한배 아니오 實은 古代 그리스 로마의燦爛한古典을硏究하고 理解하여 更히 正邪曲直을 判知하여 疑를破하고 理를推한所以로다.

        사라센文明이歐洲人의게接觸됨과갓치 西洋文明의 刺戟을受한됴션靑年들은 우리 古人의 才學을 硏究理解하여 卽孔子所謂蘊故而知新을 하고 또 그리피스氏의所謂 新科學을學得하는同時에 自然界의 秘密을吟味發見 하여 한번 보다燦爛하고 보다偉大하고 보다高尙한 新文明을復興할지어다하는同時에 『隱國朝鮮』을 쓸때에가슴이답〃하고 歎息이不絶하던 우리의 尊獻할만한 그리피스氏를 喜歡爽快할일이 아닌가!?

     

      유럽에서 르네상스가 일어날 수 있었던 근원은 신대륙의 발견이나 여러 과학상의 발명보다 고대 그리스․로마의 고전을 연구, 이해하여 ‘正邪曲直’을 판단하고 의심되는 바를 깨뜨린 데 있었다고 보았다. 조선의 경우, 찬란한 역사를 지녔고, 선조로부터 훌륭한 문화를 물려받았음에도 다른 나라에 뒤쳐진 까닭은 선조들이 만든 ‘문예사업’을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독창적인 건설발명을 이룰 수 없었던 탓이라고 생각하였다. 즉, 문화발달의 정도가 민족의 성패와 직결된다고 인식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보다 요구되는 것은 과거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일이며, 그 작업은 서구의 과학을 통해서 이루어질 것이며, 한편으로 봉건적 구습을 타파하여 근대화를 성취하는 일이 요구되었다.

     

          一旦局이 閉하쟈마쟈 此에 前後하여 新思潮 – 요새말로하면 改造 -가 秦西의 一部에서 起하여 世界全土에 彌滿하니 우리도 겨우 影響을 밧어서 社會各面에 新空氣가 澎溢하게 되었다. 동시에 우리는 貧弱한 精神과 努力으로 제법 諸方面의 改造運動, 各種新事業의 建設을 實行하는 役員의 一群이 되었다.……달리 말하면 우리의 文化的 使命은 우리 靑年으로붓허 將來에 잇다 생각한다. 나는 信한다 – 우리는 獨創力이 豊富하던 사람의 子孫이오, ᄯᅩ 或意味에 잇서 解放된者일다, 卽 守舊的 儒敎思想에서 解放된者오, 頑固한 禮節에서 解放된者오, 非科學的敎育에서 班閥主義에서 自由로된者일다, 才와能을 잇는 대로 발휘할 수 잇는者일다. 우리의 文化가 將來에 잇서 意味深長할 줄노 思한다. 지금 우리는……少하여도 中古暗黑時代을 버서나서 모든 束縛을 脫하고 學問과 生活의 自由를 구하려는 文藝復興的의 伊太利人일다,………더욱 新意味의 文化的 集團(Culture Group)은 우리의 손으로 新히 建設하여 傳치 아니하면 아니 되겟다.

     

      이병도는 유교와 예절, 비과학, 양반 등으로 상징되는 봉건사회로부터 해방되어, 서구 근대사회로 나아가는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하였으며, 그러한 속에서 자유의 추구를 중시하였다. 그리고 1919년 1차 세계대전 이후 ‘改造論’의 유행 속에서 새로운 문화적 집단을 만드는 것이 조선청년들의 문화적 사명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이병도의 이와 같은 입장은 1920년대 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의 ‘문화운동’의 범주 안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현실적으로 식민지지배에서 벗어나기 힘들고 조선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근대적 실력을 양성하기 위한 ‘문화운동’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병도가 『동아일보』에 「조선사개강」을 연재하거나, 문인들과 잡지를 창간하고 문인회를 결성한 것 등은 문화운동의 실천이었을 것이다. 또 우리 문화의 우수한 예들을 나열하고, 세종대왕의 위업에 대해서 이야기하거나, 한글을 보급하자는 글을 쓴 것도 마찬가지이다.

      1934년 진단학회의 창립도 문화운동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이해된다. 다만 이 시기에 문제가 되는 것은 ‘조선인에 의한 조선(문화) 연구’의 함의일 것이다. 이에 대해 이병도를 비롯한 실증사학자들이 현실문제와 거리를 둔 순수한 학문 연구를 표방하였으나 실상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깊은 애정과 사명감을 안고 있었다고 보기도 한다. 하지만 1930년대 민족주의자의 민족문화론이 두 가지 경향으로 나뉘어졌음에 유의할 필요가 있겠다.

      1930년대 일제의 대륙침략이 본격화되면서 파시즘 체제를 형성하며, 일제는 황민화 문화정책을 강화하였다. 이때 조선문화의 ‘전통’과 ‘고유성’은 일제의 동화주의 문화지배정책의 일환으로 변용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족문화론은 두 가지로 나뉘어졌다. 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의 ‘문화혁신론’은 조선의 지도원리는 여전히 반봉건에 입각한 자본주의적 문명화를 기본으로 한다는 부르주아적 사고에 입각하여 일제 체제 내에서 보편적인 근대문화의 수립을 지향하는 것이었다. 반면, ‘조선학운동’에서는 강대국의 국가주의와 약소민족의 민족주의를 구분하며, 약소민족의 민족주의의 주체성과 실천성을 인식하고 민족문화의 주체성을 계급문제와 대립하는 것으로 설정하지 않았다.

      양자의 큰 차이는 식민지의 틀을 벗어나 자주적 근대국가의 수립을 전망하는지 여부였다. 전자와 같이 정치적 독립을 지향하지 않는 민족문화의 경우 종속적․토속적 의미에 한정되어 일제의 지역문화, 식민문화로서의 조선문화가 될 수밖에 없었다.

      현실정치를 초월한 학술연구를 추구한 진단학회에서 이루어진 조선인에 의한 조선(문화) 연구는 일본의 지역학으로서의 ‘조선사’ 연구로 수렴되었을 가능성이 더 컸다. 정치적 독립에 대한 지향이 결여된 일제에 대한 학문적 대결은 그야말로 학문적 대결에 그칠 뿐이었다.

      이병도에 대해서 비판할 때 한사군의 위치를 한반도 내에 비정한 것이나 󰡔三國史記󰡕 초기기록을 불신한 것 등은 그 자체가 비판의 대상이 되기는 어렵다. 민족주의 사학자들처럼 한사군을 한반도 밖에 비정하는 것보다 한반도 내에 위치를 비정하는 것이 학문적으로 더 타당성을 갖는다. 문제가 되는 것은 한사군 문제를 다루는 입장, 시대적 현실에 대한 인식일 것이다. 이병도의 연구는 민족적 문제를 염두에 두지 않은 채 일본 사학계에 한 가지 새로운 견해를 제시한 것이었고, 그것은 일본 사학계 내에 충분히 수용 가능한 것이었다고 여겨진다. 더 나아가 그의 학문은 식민지 현실에서 ‘순수’하기 어려웠으며, 이병도가 말하는 고대 삼국을 매개한 일본으로의 대륙문화의 전파나 ‘신라의 화랑’은 ‘內鮮一體’나 일본의 국가주의, 전체주의를 지지하는 국민을 만드는 데 동원될 수 있었다.

     

    5. 맺음말

      지금까지 일제 관학의 영향을 받으며, 해방 이후 남한사회에서 주류적 위치를 차지하였던 실증사학자 이병도의 생애와, 역사 연구방법과 현실인식 등을 살펴보았다. 이병도의 역사학은 보통 ‘실증사학’이라고 불리며, 독일 랑케의 역사주의를 수용한 일본의 관학 아카데미즘의 영향을 받았으며 세밀하고 철저한 문헌 고증에 충실한 역사연구를 수행한 것으로 평가받아왔다. 그의 연구는 많은 문헌들을 망라하여 철저히 비판하여, 지리나 연대비정 등 역사연구에 필요한 기초적인 연구를 제공했다고 볼 수 있다.

      이병도를 비롯한 실증사학자들은 개별적 사실을 고증하는 것을 역사연구로 삼아 그들에게 과거 사회를 바라보는 일관된 체계가 부재함은 인정되지만, 그들이 어떠한 역사인식[史觀]을 갖지 않은 채 순수하게 연구만을 수행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판단하였다. 주로 이병도의 초기 글을 분석하여 이병도가 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의 문화주의를 공유하였다고 보았고, 따라서 이병도의 역사학을 실증사학이 아니라 ‘문화주의 역사학’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견해가 타당성을 가진다고 생각한다.

      실증과 문화주의가 이병도나 여타 실증사학자들의 역사학의 전부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문화주의는 이병도가 무엇을 왜 연구하고자 했는지를 설명하는 데 일정 정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특히 식민지라는 현실에서 그들이 정치에 초월하여 학문을 추구하였던 것이 아니라 일본의 제국주의 지배를 인정하는 가운데 그 안에서 ‘조선의 문화’를 연구하였던 논리적 한계를 드러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병도가 수행하였던 연구의 구체적인 주제나 내용들과 관련지어 설명하는 데 있어서 문화주의라는 요소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좀 더 분석이 필요하리라 생각된다. 그리고 이병도에 대한 분석을 지금까지 실증사학자로 분류한 여타 연구자들에게 그대로 확대, 적용할 수 있는지도 앞으로 검토되어야 할 과제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