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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구소 학술동향] 고대 두만강 유역의 주민집단과 고구려의 책성(2부)

    관리자 2020-12-04 564

    [도판 1] 혼춘 고성촌(古城村) 1호 사묘지 출토 기와편(1~3)과 요녕성 북표(北票) 금령사(金嶺寺) 기와편(4~9)

    (출처 : 宋玉彬, 2015, 「试论佛教传入图们江流域的初始时间」, 『文物』11>

     

          고대 두만강 유역의 주민집단과 고구려의 책성 (2부)

     

                                                                                                                             이종록(고려대학교 박사과정)

     

    책성, 고구려의 동북지역 지배의 중심지가 되다

     

      앞서 설명한 대로 이 지역은 사료상에 북옥저, 고고학적으로는 단결-크로우노프카 문화의 소재지로서 고구려와 문화적으로 구별되는 지역이었다. 교통의 요지로서의 중요성과는 반대로 고구려의 직접 통치에는 일정한 제약이 있었던 것이다. 이 제약을 극복하기 위해 고구려가 취한 조치로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정책은 이 지역으로의 외부 주민의 이주를 들 수 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산상왕조에 따르면 재위 21년에 평주(平州) 사람 하요(夏瑤) 등 1천여 가(家)가 중국으로부터 고구려로 투항해 왔으며, 이들을 책성 일대에 안치시켰다고 전한다. 이러한 외부인들을 굳이 고구려의 중심지가 아닌 책성 일대에 안치한 이유는 무엇일까? 기존 연구에서는 이 조치에 일종의 ‘지역 개발’ 의도가 있었다고 지적한다. 곧 이방인이자 고구려의 중앙에 의존해야 하는 주민들을 이주시킴으로서 해당 지역의 주민들을 견제하는 동시에, 중앙의 지배력을 침투시키는 첨병으로 활용했다는 것이다.

      이런 외부인의 사민(徙民)은 『삼국사기』에서는 위의 하요의 사례 외에는 찾을 수 없다. 그러나 그 전후에도 사료 기록되지 않은 책성으로의 사민은 지속적으로 이어졌던 것 같다. 1996년 중국 측의 조사에서는 혼춘의 온특혁부성에 그물문이 시문된 기와편이 출토를 보고한 바가 있다([도판] 1). 이들은 4세기 무렵 요녕성 북표에서 확인된 전연(前燕)계 기와들과 그 형식상에서 유사성을 보이고 있다. 보고 당시에는 별다른 검토가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최근 몇몇 연구에서 이 기와를 주목하며, 이 지역에 전연 문화를 흡수한 이주민들의 존재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이에 따르면 346년 전연의 부여 침략 당시 부여왕을 비롯한 5만 명의 인구를 포로로 잡아 요서 지역으로 압송되었으며, 여기에서 전연의 문화를 흡수한 부여인들이 이후 이 지역에 거주하면서 기와를 제작했다고 추정한다.

      그런데 요서지역의 전연 문화를 부여 주민들과 연결시킨 견해는 「광개토왕비」에 등장하는 동부여(東扶餘)를 감안한 것으로, 곧 「광개토왕비」에 등장하는 동부여의 실체가 이 시기 혼춘 일대로 이주한 부여인들이었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전연으로 끌려간 포로 중에서는 부여만이 아닌 고구려계의 주민들도 존재했기에 기와편의 제작 주체는 고구려인일 가능성도 있다. 이 경우는 고구려인 포로들이 전연의 문화를 받아들이고 여기에 이주하여 기와를 제작한 것이 될 것이다.

      어쨌든 이 지역에는 고구려나 부여계 어느 쪽이든 전연 문화를 흡수한 집단이 거주했던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요서지역과의 거리와 출토지가 책성으로 비정되는 온특혁부성임을 감안하면 이들 집단은 고구려의 중앙에 의해 계획적으로 사민된 집단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고구려의 질자 출신들이 4세기 이후 고구려에 귀환한 이래 전연계 문화의 수용이라는 측면에서 고구려의 국가체제 정비에 참여했다는 최근 연구를 참고한다면, 이들 또한 정책적인 사민의 대상이 아니었나 싶다. 곧 중국계 문화를 흡수한 주민들을 이 지역 지배의 매개로 활용하기 위해 보내진 것이며, 이는 산상왕대 하요와 중국 유민들에 적용된 정책에 연장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책성은 고구려 중기에 들어서도 그 중요성을 잃지 않고, 고구려의 중앙에 의해 지속적으로 그 지배권을 유지하기 위한 정책이 취해졌던 것이 된다. 이는 이후 숙신(肅愼), 말갈(靺鞨)등의 집단들이 끊임없이 연해주-두만강 유역에서 이주와 변동을 거듭하면서도 변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후 『위서』에서 책성을 고구려의 국경 최동단으로 설정한 것은 이 시기에도 책성이 이종족과의 접점이자 최전선이었던 사실을 반영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고구려가 초기를 지나 중기 이후 그 정치적 성숙도가 높아지면서, 책성의 기능은 더욱 확장되어 제도적으로도 이 지역 전체를 통괄하는 체제가 완성되었다고 여겨진다. 이는 「이타인묘지명」에서 그 존재가 확인된 ‘책주도독(柵州都督)’이라는 직함과 그 관할 대상들로부터 유추할 수 있다.

     

    [도판 2] 「이타인묘지명(李他仁墓誌銘)」 탁본 사진

    (출처 : 여호규·李明, 2017, 「高句麗 遺民 〈李他仁墓誌銘〉의 재판독 및 주요 쟁점 검토」, 『한국고대사학회』85>

     

      「대당우령군 증우효위대장군 이타인묘지(大唐右領軍 贈右驍衛大將軍 李他仁墓誌)」, 곧 「이타인묘지명」으로 불리는 묘지명은 1989년 중국 섬서성(陝西省) 서안시(西安市)에서 발견된 고구려 유민의 묘지명이다. 이타인은 609년에 태어나 고구려 후기에 관인으로 활동하였으며, 고구려 멸망시 당나라에 항복하였다. 그 공적으로 중국에서 관직을 받았으며 몇 년 후인 675년에 당나라 장안에서 사망하였다. 이타인과 그의 묘지명은 본인의 활동상 자체도 관심의 대상이지만, 여러 연구자들이 특히 주목한 부분은 그가 고구려에서 마지막으로 역임했던 관직인 ‘책주도독 겸 총병마(柵州都督兼總兵馬)’이다. 여기에서 그는 책주도독으로서 그의 역할을 “고려 12주를 관장하고 말갈 37부를 통괄하였다(管一十二州高麗統三十七部靺鞨)”라고 서술하고 있다. 『구당서(舊唐書)』에 따르면 고구려에는 욕살(褥薩)이라는 관직이 있어서 중국의 도독과 동일한 최상위 지방관이었다고 하여, 이타인 또한 곧 욕살의 관직을 역임했을 것으로 보인다. 책주, 곧 책성의 도독은 이타인 이전에도 「고자묘지명(高慈墓誌銘)」에서 확인되는 것처럼 고량(高量)이라는 인물도 역임한 바가 있어 고구려 후기에는 이 책성에 도독급 관리를 파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 책주도독, 곧 책성의 욕살로 볼 수 있는 이타인이 37개의 말갈 부락을 거느리고 있었다는 점은 해당 관직과 이 시기 책성의 기능을 시사하고 있다. 여기에서 37개나 되는 말갈의 부락은 속말말갈(粟末靺鞨)로 보는 경우도 있지만 국내 연구에서는 대개 백두산 주변에서 두만강 유역, 보다 널리는 연변 일대를 포함하는 백산말갈(白山靺鞨)의 집단으로 파악한다. 이들은 고구려에 소속되어 있었으나 부락 단위로 거주하면서 각 부락의 말갈 추장들이 이들을 집단적으로 통솔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고구려는 이들 추장들을 매개로 하여 말갈 부락들을 간접적으로 지배하고 있었으며, 책성의 욕살은 이들 추장들 전체의 관할을 담당하였던 것이다. 곧 과거 북옥저인들을 지배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 시기의 말갈 또한 책성을 중심으로 하여 주변 지역, 특히 이종족을 통제하는 체제가 유지되었던 셈이다.

      나아가 책성은 “고려 12주를 관장(管一十二州高麗)”했다는 말처럼, 말갈 부락만이 아닌 이 지역에 설치된 고구려의 하위 행정구역을 관할하는 역할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말하자면 이 시기에 책성은 단순히 1개 거점만이 아닌 주변 행정구역과 여기에 포함된 말갈 부락을 모두 통괄하는 상위의 행정구역으로 정착되었던 것이다. 이는 고구려가 건국 초기부터 이 지역의 지정학적 중요성, 곧 주변 집단 전체를 관할하는 중심지적인 입지에 착안하여 지속적으로 그 지배력을 다져왔던 정책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으며, 이것이 고구려의 국가적 성장과 병행하여 구축된 체제였다고 할 수 있다.

     

     

    향후의 관련 연구를 위하여

     

      지금까지 책성이 고구려 초기에서부터 그 멸망에 이르기까지의 연혁과 관련 연구를 간략하게 정리해 보았다. 책성은 고구려의 지방통치 혹은 이민족 지배방식과 같은 분야에서도 주목해야 할 기구임은 틀림없으나, 한편으로는 그 자체로도 흥미로운 검토 대상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이 지역에 한정하여 초기에서부터 멸망기, 더 나아가 발해시대로 이어지는 변천사를 추적하는 것 또한 중요한 의미가 있을 것 같다. 왜냐하면 위에서 간략하게나마 살펴본 대로, 책성은 이 지역 주민집단들의 변동과 고구려라는 국가의 성장과 함께하며 성장하고 그 기능이 변화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료의 영세함으로 인해 논의를 진전시키기에는 제약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위의 책성에 관한 논의는 극히 한정된 사료와, 더욱 영세한 고고학 자료를 토대로 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책성의 기능이나 성격에 추론 이상을 이야기는 것은 망설여진다. 그럼에도 연구의 단서는 이 지역에 아직 풍부하게 잠재되어 있을 것이기 때문에, 향후의 연구는 고무적이라고 할 수 있다. 앞서 소개한 혼춘 고성촌 기와편이 암시하는 것처럼, 이 지역은 북옥저인들에서부터 부여·읍루·고구려 등의 다양한 문화집단간의 교류 혹은 충돌의 장이었기 때문이다.

      이를 감안한다면 책성은 한 국가의 지역 지배기구라는 정치사적인 측면만이 아닌, 이질적인 문화를 가진 한 집단이 다른 집단을 지배 혹은 교류의 중심지라는 측면에서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곧 몇 세기에 걸친 그 지배방식 혹은 문화 교류의 양상이 집약되어 있을 것이라는 점에서 이 지역에 잠재된 자료들은 그 가치가 적지 않을 것이다. 향후 조사가 보다 진전된다면 이런 지역에 대한 강한 정복과 지배 의욕을 드러내었던 고구려의 의도도 보다 분명히 우리에게 밝혀질 것으로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