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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구소학술동향] 가셴둥[嘎仙洞] 석실과 선비(鮮卑)의 기원 (1부)

    관리자 2020-05-13 15:13 650

    [가셴둥 선비 석실 전경]

                           가셴둥[嘎仙洞] 석실과 선비(鮮卑)의 기원 (1부)

                                                                                                       이승호(한국고대사·고고학연구소 학술연구교수)

     

    가셴둥 선비 석실과 벽면에 새겨진 「선비석실축문(鮮卑石室祝文)」

      가셴둥 선비 석실은 중국 북동부 네이멍구[內蒙古] 자치구 후룬베이얼시[呼倫貝爾市] 오로촌 자치기[鄂倫春自治旗] 아리허진[阿裏河鎭] 동북쪽 10km 지점에 위치해 있다. 1980년 기자 출신 향토사학자 메이원핑[米文平]에 의해 처음 발견되었다. 유적이 위치한 지역은 다싱안링[大興安嶺] 동북단 정상 동쪽 끄트머리 지점에 해당하며, 현재 주변에는 ‘가셴둥 삼림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가셴둥 선비석실 위치]

      석실은 넌강[嫩江] 지류인 간허[甘河] 북안에 위치한 갈산산[噶珊山] 중턱 화강암 절벽 위에 자리하고 있는데, 높이 10m, 너비 20m의 천연 동굴로서 안에는 대략 천여 명이 모여 집회를 가질 수 있을 정도로 넓고 평탄한 공간이 있다.


    [가셴둥 선비 석실 내부 전경과 동굴 도면]

      이 가셴둥 선비 석실과 관련하여 『위서(魏書)』 권108, 예지(禮志) 1에는 “오락후국(烏洛侯國) 서북쪽에서 돌을 새겨 조종지묘(祖宗之廟)를 만들다(鑿石爲祖宗之廟於烏洛侯國西北)”라는 기록이 있으며, 이와 함께 아래와 같은 제문(祭文)이 전한다.

      天子 燾는 삼가 敞 등을 보내어 준마[駿足]와 제사용 소[一元大武]를 바치며 皇天之靈에게 감히 알립니다. 啟闢의 초기로부터 이 땅[土田]에서 皇祖를 보우하시어 億年을 거쳐 마침내 남으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오직 우리 조부와 부친만이 中原을 聖德으로 널리 다스렸습니다[光宅]. 흉악한 무리[凶醜]를 이겨 없애고 사변을 개척하여 안정시켰습니다. 어리석은 제가 왕업을 이어받아 유덕하다는 소리를 드러내지 못했습니다. 幽人이라는 자들이 멀리서 머리를 조아리고 내조하니 舊廟가 아니 헐어지고 아니 부서졌다는 것을 자세히 알게 되었습니다. 아득히 먼 옛날을 생각하며 남겨진 광덕[餘光]을 우러르길 바라옵니다. 왕업이 흥함에 皇祖로부터 일어났고 면면히 瓜瓞처럼 이어져온 것은 때맞춰 많은 天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감히 功業을 받들어 하늘에 배향하오니 자자손손 복록이 영원히 이어지기를.  (『魏書』 卷108 禮志 1)
      (天子燾, 謹遣敞等用駿足、一元大武, 敢昭告于皇天之靈. 自啟闢之初, 祐我皇祖于彼土田. 歷載億年, 聿來南遷. 惟祖惟父, 光宅中原. 克翦凶醜, 拓定四邊. 冲人纂業, 德聲弗彰. 豈謂幽遐, 稽首來王. 具知舊廟, 弗毀弗亡. 悠悠之懷, 希仰餘光. 王業之興, 起自皇祖. 綿綿瓜瓞, 時惟多祜. 敢以丕功, 配饗于天. 子子孫孫, 福祿永延.)

      또한 위의 제문이 남게 된 경위와 관련하여 『위서』 권100 열전88 오락후국 조에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기록도 전하고 있다.

      世祖 (太平)眞君 4년(443)에 (오락후가) 來朝하여 칭하기를, ‘그 나라 서북쪽에 [북위] 국가 선대 황제의 오래된 무덤이 있고, 石室이 남북으로 90보, 동서로 40보, 높이는 70척이며 석실에 신령스러운 기운이 있어 백성들이 대부분 [그곳에서] 기원 드린다’고 하였다. 世祖가 中書侍郞 李敞을 보내 제사를 지내고, 석실 벽에 祝文을 새기고 돌아오도록 하였다.  (『魏書』 卷100 列傳88 烏洛候國)
      (世祖眞君四年來朝, 稱其國西北有國家先帝舊墟, 石室南北九十步, 東西四十步, 高七十尺, 室有神靈, 民多祈請. 世祖遣中書侍郞李敞告祭焉, 刊祝文於室之壁而還.)

      위의 기록에 보이는 북위(北魏) 중서시랑(中書侍郞) 이창(李敞)이 새기고 돌아왔다는 축문은 동굴 입구로부터 왼쪽 벽면 15m 지점에 각석되어 있다. 이를 중국학계에서는 「선비석실축문(鮮卑石室祝文)」이라 부르는데, 총 201자로 된 제문의 탁본과 판독 및 해석은 아래와 같다.


    [선비석실축문(鮮卑石室祝文) 위치와 탁본]

    《원문》      * ‘ 」 ’는 행이 바뀌는 자리
      維太平眞君四年, 癸未歲, 七月二十五日,」 天子臣燾, 使謁者僕射ㆍ庫六官」ㆍ中書侍郎李敞ㆍ傅兎, 用駿足ㆍ一元大武」ㆍ柔毛之牲, 敢昭告于」皇天之神. 啓辟之初, 佑我皇祖, 于彼土田,」 歷載億年, 聿來南遷. 應受多福,」 光宅中原. 惟祖惟父, 拓定四邊. 慶流」後胤, 延及沖人, 闡揚玄風, 增構崇堂. 剋」翦凶醜, 威暨四荒. 幽人忘遐, 稽首來王, 始」聞舊墟, 爰在彼方. 悠悠之懷, 希仰餘光. 王」業之興, 起自皇祖, 綿綿瓜瓞, 時惟多祐.」 歸以謝施, 推以配天, 子子孫孫, 福祿永」延. 薦于」皇皇帝天」ㆍ皇皇后土, 以」皇祖先可寒配,」 皇妣先可敦配,」 尙饗.」 東作帥使念鑿.」

    《해석》
      아[維]! 太平眞君 4년(443년) 계미년 7월 25일. 天子인 臣 燾는 謁者僕射 庫六官 中書侍郎 李敞과 傅兎로 하여금 빠르고 훌륭한 말[駿足]과 제사용 소[一元大武]와 양[柔毛]을 제물[牲]로 하여 皇天之神에게 감히 알립니다.
      啓辟의 초기 이 땅[土田. 가셴둥 일대]에서 우리 皇祖를 보우하시어 億年을 거쳐 마침내 남으로 옮기어 많은 복을 받은 덕분으로 中原을 聖德으로 널리 다스렸습니다[光宅]. 오직 우리 조부와 부친만이 사변을 개척하여 안정시켰습니다. 경사가 후손에게까지 흘러내려 어리석은 짐[沖人]에게까지 이어져 玄風[도교]을 드러내어 널리 밝히고[闡揚] 높은 묘당[崇堂]을 늘려 세웠습니다. 흉악한 무리[凶醜]를 이겨 없애니 위세는 사방[四荒]에 미쳤습니다. 幽人[오락후국 사신]이 멀기를 마다않고 머리를 조아리고 내조하여 왔는데, 비로소 [우리 조상의] 옛 무덤[舊墟]이 이곳에 있음을 듣게 되었습니다.
      아득히 먼 옛날을 생각하며 남겨진 은덕[餘光]을 우러르길 바라옵니다. 왕업이 흥함에 皇祖로부터 일어났고 면면히 瓜瓞처럼 이어져온 것은 때맞춰 많은 天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돌아와 감사하며 베풀고, 받들어 하늘에 바치오니, 자자손손에 福祿이 영원히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皇皇帝天과 皇皇后土에게 [공물을] 올리오며 皇祖 先可寒을 배향하옵고 皇妣 先可敦을 배향하오니 적지만 흠향하옵소서[尙饗]. 東作帥使 念이 새김.

      위의 각석 명문 내용은 앞서의 『위서』 권108, 예지 1에 실려 있는 제문과 대동소이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처럼 가셴둥 석실에서 북위 시대에 새겨진 축문이 발견됨으로써 이곳에 탁발선비의 선조들이 살았음이 분명해졌고, 이를 통해 가셴둥 선비 석실과 이 일대는 선비족 탁발부의 발상지로 알려지게 되었다. 기원후 1세기 무렵 탁발선비 집단이 후룬호로 이동하기 전까지 이곳은 탁발선비의 안식처였다.